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니체 (문단 편집) === 귀족 도덕 ===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좋음ㆍ선함(gut)'이라는 단어에 대한 어원학적 탐구를 통해 그것의 원래 의미를 찾아나간다. '좋음(gut)'은 원래 귀족을 가리키는 '고귀한', '기품 있는', '특권을 지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좋음'과 관련된 단어들과 어근에서는, 귀족들이 스스로를 '강력한 자', '지배하는 자', '명령하는 자'라는 뉘앙스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립하는 단어인 'schlecht'라는 독일어는 원래 평민을 가리키는 '소박한', '단순한'이라는 뜻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비난의 의미가 없었다. 즉, 귀족들은 스스로를 '좋은 것(gut)'으로 평가하고 나서, 이후에 그렇지 못한 평민들을 '나쁜 것(schlecht)'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반면 gut에 대립하는 또 다른 단어, '악함(böse)'은 귀족이 생각해낸 단어가 아니다. 넘쳐흐르는 자신감과 활력을 지니고 있는 귀족은 자신의 넘치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적을 필요로 하므로 경멸할 점이 전혀 없고 존경할 점이 매우 많은 자만을 자신의 적으로 삼기 때문에 '(상대가) 악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악함(böse)'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우리는 모든 귀족적인 종족의 근저에서 맹수, 즉 전리품과 승리를 탐욕스럽게 찾아 헤매는 '''야만인'''(Barbar)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미치광이 같고 비이성적이고 갑작스럽게 표출되는 '대담함',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그들이 행하는 모험의 예측 불가능함, 안전ㆍ육체ㆍ생명ㆍ안락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과 경멸, 온갖 파괴를 자행하고 승리와 잔인함을 탐닉하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전율할 정도의 쾌활함과 깊은 쾌감''' 등을 말이다. 그들 기사적 귀족에게는 '''강한 육체, 젊고 왕성하며 넘쳐흐르기까지 하는 건강, 그러한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 즉 전쟁, 모험, 사냥, 춤, 투기와 강하고 자유로우며 쾌활한 행동'''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추구해야할 가치다. 반면 이러한 귀족들에게 억압당하고 짓밟히고 능욕당한 자들은 무력감에서 비롯된 복수심 서린 간계(奸計)로 자기들끼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 악한 자들과는 다른 존재, 선한 존재가 되자! 선한 인간이란 능욕하지 않는 자,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우리처럼 인내하고 겸손하며 올바른 자이다." '''즉, 약한 자들은 가장 깊은 증오와 원한을 가지고, 자신의 적과 정복자들의 가치(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를 철저하게 '악한 것(böse)'으로 전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노예도덕[* 여기서 '귀족도덕'과 '노예도덕'이라는 이분법적 설명이 보이지만, 이렇게 귀족-노예의 구분은 '설명상' 이분법적인 것으로, 바로 이러한 전략은 이분법을 해체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는 니체가 한 말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니체는 '''한 사람의 의지에도 '귀족'과 '노예'가 섞여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사실은, 귀족과 노예를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구분하기란 어렵다는 말이다. 니체는 심지어 그 '이분법적 설명'조차도 싫어해서, 그 귀족도덕이 가리키는 바가 '명확한 것'이 아니라 어떤 애매한 '유형', '취향', '뉘앙스'로 설명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이분법적 설명'을 하는 이유는 '기존의 고정된 이분법적 가치'를 전도(顚倒)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니체의 설명에서 '기존의 고정된 가치'인 줄 알았던 것이 끊임없이 전도(顚倒)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니체 자신도 그 '가치의 전도'를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기존의 고정된 이분법적 가치'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쉽게 말하자면, 기존에 우리는 도덕은 따라야만 하는 것이고 비도덕은 배척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니체는 '귀족-노예'의 '이분법적 설명'을 제시하고 그 가치를 전도시킴으로써, 기존 도덕 가치와 비도덕 가치의 이분법적 구분에 의문을 품게 하고 그 이분법적 구분이 무의미함을 유도한다. 이런 '계보학적 방법'은 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미셸 푸코]]가 니체의 이러한 계보학적 방법론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에서는, 보복하지 못하는 무력함이 '선량함'으로 바뀌고, 겁에 가득찬 비굴함은 '겸손'으로 바뀌며, 자신이 증오하는 자들에 대한 복종은 '순종'으로 바뀌고, 약한 자의 비공격성, 그가 풍부하게 지닌 비겁함 자체, 문 앞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인내'로 바뀐다. 여기에선 복수할 수 없음이 복수하고 싶어 하지 않음이라고 불리고 심지어는 용서라고까지 불린다. 니체는 이러한 가치의 전도가 '양심의 가책(죄책감)'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양심의 기원을 알아내기 위해서 '형벌'을 우선 살펴본다. 머나먼 과거에 형벌이라는 것은, 갚지 못한 빚에 대한 보상으로, '''채무자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채권자가 그 쾌감을 맛보게 하고''' 피해에 대한 분노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 잔인함이라는 것이 고대 인류의 거대한 축제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 것이었던가. 그것은 오늘날에도 정신화되고 신성화되어서 이어져오고 있다. 실로 냉혹한 명제이긴 하나, 타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더욱더 유쾌한 일이다.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역사는 '잔인함이 없이는 축제도 없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형벌에도 축제적인 성격이 참으로 많이 존재한다! 이런 자들에게서 '양심의 가책'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자명하다. 반대로 형벌을 당하는 입장에 있는 '죄 지은 자'에게서 형벌은, 대체로 인간을 비정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만드는 것이다. 범죄자는 재판 절차나 집행 절차를 실제로 목격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행위와 행위방식을 그 자체로서 비난받아야 할 것으로 보지 않게 된다. 행동만 놓고 보면, 자신의 범죄나 공동체의 형벌이나 그 폭력적 행위 자체는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벌이 죄를 지은 자에게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킨다는 믿음은 틀린 것이다. 역사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저 수천 년을 생각해본다면, 죄책감의 발달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한 것은 도리어 형벌이었다고 주저 없이 단정할 수 있다. 그럼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지배자는 국가가 만들어지자 그 권력으로 약자들을 더 용이하게 관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잔인한 형벌'을 금지시켰고, 약자들은 그 잔인함에서 비롯되는 쾌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지배자의 권력에 자유를 억압당한 약자들이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외부로 향하던 그 자유의 본능을, 방향을 바꾸어 그 자신의 내면세계에 폭발시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적의, 잔인함, 박해를 가하려고 하고 습격하려고 하며 변혁하고 파괴하려는 욕망, 이 모든 것이 바깥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을 향하는 것. 이러한 '''내면화'''가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 하는 병에 걸린 인간은 성급하게 자기 자신을 찢고 박해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이 은밀한 자기 학대, 이러한 예술가적인 잔인성, 자기라는 둔중하고 반항적이며 고통스러워하는 소재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하여, 그것에 의지, 비판, 모순, 경멸, 부정을 새겨 넣는 이 쾌감, 자신을 괴롭히면서 느끼는 쾌감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분열시키는 영혼의 이러한 능동적인 '양심의 가책' 전체야말로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사건들의 진정한 모태로서 수많은 신기한 아름다움과 긍정을 출현하게 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종족 공동체에서 현재의 세대는 이전 세대의 희생과 업적의 덕택으로 존속한다는 확신에서 조상에게 그러한 빚을 되갚아야 한다는 일종의 법률적 의무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빚을 지불하기 위해, 제물, 축제, 예배당, 의례, 특히 조상이 만든 모든 관습에 대한 복종함으로서 그 의무를 행했다. 관습에 대한 복종 의무에서 비롯된 힘과 그 힘에서 느끼게 되는 '조상에 대한 공포'는, 종족 자체의 힘이 증대되는 것에 정확히 비례해서 필연적으로 점점 커진다. 가장 강력한 종족들의 선조는 증대되는 공포 자체의 상상에 의해서 종내에는 어마어마한 존재로 커지게 되고,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신으로 변형되어 믿어진다. 아마도 여기에 '''신들의 기원''' 자체가, 즉 '''공포로부터의 기원'''이 존재한다!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신성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이러한 의식은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의 조직 형태가 몰락한 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저 널리 퍼져 있던 노예들과 예속된 주민들은 강제에 의해서든 굴종과 모방에 의해서든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의 신들을 숭배하였고, 이와 함께 '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 역시도 수천 년에 걸쳐서 부단히 성장했다. 세계제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투쟁과 통합의 역사는 또한 항상 보편적인 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독립적인 귀족계급을 제압하는 것으로 성립되는 전제 정치는 항상 어떤 일신교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도달된 최대의 신인 그리스도교 신의 출현과 함께 또한 최대의 부채의식이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양심의 가책'이 다시 등장한다. 이제 비관적인 일이지만, 빚을 완전히 변제할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는데도, 인간은 신에게 진 그 빚마저도 '자신의 고통'으로 변제하려고 한다. 제물, 축제, 예배당, 의례 등 예전의 어떤 방식으로도 빚을 완전히 변제할 가능성이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인간에게 그 죄를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이윽고 신에 대한 그 빚에 괴로워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스스로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양심의 가책'에는 귀족(지배자)으로 인해 동물적 본능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약자들의 기억이 새겨져 있었는데, 죄의 내면화는 이러한 인간 자신의 동물적 본능들 자체를 신에 대한 죄로 해석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동물적 본능이 일어날 때마다 인간은 '신'과 '악마'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장이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빚을 상환할 수 없다는 것과 함께 어떠한 벌로도 자신이 지은 죄를 보상할 수 없다는 생각, 즉 속죄가 불가능하다는 '영원한 벌'의 사상이 싹튼다. 인간은 이러한 이상을 세움으로써 그와 같은 이상 앞에서 자신이 절대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려고 든다.[* 정확히는 '동물적 본능을 지닌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 물론 그런 잔인한 확인 속에는 은밀한 쾌감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현실에서의 삶을 소외시키고 배제한다. 니체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오는 쾌락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를 병든 사람으로 보았다. 그들은 삶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국 '활력있는 삶의 생생한 가치들'을 부정함으로써 병든 자들을 더욱 병들게 만들고 상황을 악화시킨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타인에게 강제하려고 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낀다. 이를 통해 혐오와 동정이 전염되면서 건강한 자들마저도 병들게 만든다. 그래서 [[거리의 파토스]]가 양자의 임무를 영원토록 분리시켜야만 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즉,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정도로 강하고 솔직하며 강한 활력을 지닌 고귀한 자가 동등한 힘과 활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힘과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놔둬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주권자로서의 개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권자로서의 개인은 오직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관습의 도덕에서 다시금 벗어난 개인이며, 자율적이고 초윤리적인 개인(왜냐하면 '자율적'과 '윤리적'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만의 독립적이고 끈질긴 의지를 지닌 인간,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그 자신이 마침내 성취하여 체화한 것에 대해서 긍지를 갖는 의식이, 자신의 힘과 자유에 대한 의식이, 완성에 도달했다는 감정이 존재한다. 진정으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이 해방된 인간, 자유로운 의지의 소유자, 이 주권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는 모든 자보다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자인지를 어찌 모르겠는가? 이러한 자는 또한 자신의 '''가치 척도'''를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을 척도로 하여 타인을 보면서 존경하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한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자들, 강한 자들,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을(약속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을) 존경한다. 즉 주권자처럼 진중하고 드물게 그리고 오랜 숙고 끝에 약속하는 자, 쉽사리 타인을 신뢰하지 않으며 자신이 어떤 사람을 신뢰할 때 그러한 신뢰에 의해 신뢰받는 자에게 영예를 부여하는 자, 자신의 약속을 고초를 겪으면서도 심지어는 '운명에 저항하면서'까지도 지킬 정도로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을 하는 자, 이러한 모든 자를 존경한다. ㅡ 《도덕의 계보》 두 번째 논문 2절.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p.100~101 참조)] 자신의 말에 책임도 못지면서 허황된 말만 하고 남의 의지를 깍아내리려는 저열한 자가 고귀한 자를 달콤한 말로 속이게 놔둬서는 안 된다. 고귀한 자들의 생존권, 불쾌한 소리만 내는 깨져버린 종에 대해서 완벽한 소리를 내는 종이 갖는 특권은 실로 천배나 더 큰 것이다. 니체는 그렇기에 고귀한 자를 우리 사회가 '양육'해야 된다고 주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